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7세 (문단 편집) === 즉위 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dward VII Coronation.jpg|width=100%]]}}} ||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후 [[1901년]] [[8월 9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이 때 최초로 공연된 곡이 [[에드워드 엘가]]의 [[Land of Hope and Glory]]][* 여담으로 이때 [[대한제국]]이었던 조선에서도 축하 사절단을 보냈는데, 바로 [[의양군]] 이재각이다. 그 사절단 일원이었던 이응종은 <<서사록>>이란 견문록을 남겼는데 영국을 비롯해 에드워드 7세에 대한 평가도 후하게 묘사되고 있다.[[https://mlbpark.donga.com/mp/b.php?m=user&p=1&b=bullpen&id=202001140039118388&select=&query=&user=yjschc78&site=donga.com&reply=&source=&pos=&sig=h4aRSY-AjhXRKfX2h4a9Sg-A6hlq|#]] 한편 당시 [[서울대학교/학부/사범대학|관립한성사범학교]] 학생이었던 [[이병기(국문학자)|가람 이병기]]는 5월 20일자 일기에 "영국 황제의 대장식인 까닭에 오후에는 수업을 하지 않았다(休業)"고 적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64년 간 재위하면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기에 에드워드 7세도 왕이 된 뒤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내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재위 말기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훗날의 영국 제53대 [[총리]].]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영국 [[영국 귀족원|귀족원]]을 뜯어고쳤다. 즉 '''[[서민원]]이 결정한 일에 대해서 귀족원이 뒤집을 수 없는 체제로 만든 것'''이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이 사건으로 자유당의 대대적인 개혁, 일명 인민예산이 통과되면서 영국은 [[복지국가]]로의 첫발을 떼게 된다. 물론 로이드 조지가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자유당(영국)|자유당]]파 귀족들만 죽어라 키워서 다 귀족원으로 보내버릴 거다!!"라고 [[보수당(영국)|보수당]]과 귀족 사회를 협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어머니를 대신해 외국을 자주 순방한 경험과 그 자신이 [[유럽]] 각국의 왕족들과 친분 및 혈연관계가 있다는 점을 활용해[*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를 참조 바람.], [[영국]]-[[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러시아 제국]]의 3국협상을 성사시켜 [[독일 제국]]을 견제하는데 힘을 발휘할 만큼 [[외교]]에 능통했다. 이걸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1903년에 행해졌던 프랑스 방문이다. 당시의 [[영불관계]]는 공적으로는 어쨌던간에 양국의 국민 관계는 여전히 안 좋았는데 에드워드 7세가 방문 중에 보여준 모습은 프랑스인들의 호감을 크게 얻었고[* 에드워드 7세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 모인 ~~자기나라 왕과 황제는 4명(루이 16세, 샤를 10세, 루이필리프, 나폴레옹 3세)이나 쫒아낸~~ 프랑스 군중들이 '''"우리 국왕 만세!(Vive notre roi!)"'''라고 외치며(!) 환호했다고. 출처 : 8월의 포성.] [[영불협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유럽 군주들의 대표급(영국 황제[* 엄밀히는 [[인도 제국]] 황제. 영국의 당시 정식 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였고, 연합왕국의 국왕으로서 위치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황제를 일컫는 말은 영국이 성립한 인도 제국 황제(Emperor)이라는 말이다.], 독일 황제(Kaiser), 러시아 황제(Царь),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그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 시대부터 황제 자리를 대대로 세습해 온 [[합스부르크 왕가]]로, 유럽 왕실 중에서도 손꼽히게 유서깊은 정통성 덕분에 당시 유럽 내 군주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이자 원로 대우를 받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참고로 에드워드 7세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들인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루돌프 황태자]]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루돌프는 에드워드 7세의 외조카 [[빌헬름 2세]]와 사이가 안좋았는데 그런 루돌프의 심정을 에드워드도 잘 이해해줬다고.] 이러한 친화력 덕분에 에드워드 7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제1차 세계 대전]]을 피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시각도 있다. 외조카이자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에게 사탄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사이가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외삼촌의 대독일 외교정책에 대해서 빌헬름 2세는 뒤에서 궁시렁거릴지언정 감히 외삼촌에게 정면으로 덤빌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빌헬름 2세는 근본적으로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강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서 비롯된 영국 왕실에 대한 존중은 에드워드 7세 때까지도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또한 에드워드 7세가 외교에도 능했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영국인]]들은 국제 사회에서 영국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한 에드워드 7세를 '''피스메이커 에드워드'''라 부르며 지지했고, 전쟁이 싫다면 '''친절한 에드워드'''를 찾으라는 노래까지 유행할 정도였다. 물론 독일에서는 "'''뚱보 에두아르트'''[* 에드워드의 독일어식 바리에이션.]가 일만 생기면 독일에 반대한다"며 비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